고도로 체계화하는 내가 사는 세상

고도로 체계화하는 내가 사는 세상

 

‘패턴 시커(The Pattern Seekers)’ 책에 수록된 간이검사로 테스트한 결과,

저는  SQ-R-10 검사는 19점, EQ-10 검사는 8점, D점수는 11점으로 극단 S형입니다.

자폐검사 AQ-10은 3점으로 평균 수준입니다. ( ☞테스트하러 가기)

또한 인터넷 검사를 해본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SQ는 76점으로 매우 높은 수준이나, EQ는 36점으로 보통 수준입니다. SQ와 EQ 점수 차이는 40점 정도군요.

책에서는 극단 S형이 발명 등 인류의 인지혁명에 기여했다고 하는데,  안타깝지만(?) 저는 천재가 아닙니다. 그저 직장을 다니며 하루하루를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자폐인들도 서번트 증후군이 있는 사람은 소수인 거와 마찬가지지요.

다만, 체계화지수 검사를 하면서 기분이 정말 좋았습니다. 대부분의 질문이 제 이야기였으니까요. ‘아 이걸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구나!’ 싶어서요.

산을 보면 이 산맥이 어디서 뻗어  올라와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에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인지 궁금해 알아보고, 모든 나무와 동물의 정확한 이름과 계통을 알고 싶습니다. 철도와 도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머리 속 지도의 빈 부분을 채워나가며, 업데이트를 위해 새로운 장소에 가는 것을 광적으로 좋아합니다. 비행기를 탈 때 공기역학에 대해 떠올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건 놀랍습니다. 아니 비행기만한 무게와 크기의 물체가 뜨는데?!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저는 항목 하나하나에 대하여 관심에 그치는 부분도 있지만 실제 행동한 부분도 많습니다. 돌의 종류에 대한 책이 집에 있고, 돌을 주워옵니다. 나무를 공부하여 숲해설사 교육 과정을 수료하고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나무와 돌을 보기 위해 여행 목적지를 정하고, 여자로는 드물게 혼자 등산을 다니며 그런 부분을 관찰하곤 했습니다. (설악산, 월출산, 치악산 등 큰 산도 단독 등반)

경비행기 자격증을 따기 위해 서울에서 목포까지 혼자 다녔으나, 시간과 비용 문제로 취득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여전히 하고 싶은데 현재는 가족의 반대로 미래를 기약하고 있습니다. 드론도 하루 교육을 듣고 흥미가 생겨 필기를 따고 비용 문제로 실기를 하진 못했습니다. (이런 류의 교육을 회사에서 무료로 제공해 준다면 너무 좋아 울며 기쁘게 할텐데)

하지만 이 것은 단순 취미영역이고, 관심이 있고 재능이 탁월하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재능이라고 느낄려면 그 분야에서 다른 사람 대비 성과를 보이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 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저 스스로는 무언가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아카데믹 코스는 경제적 이유로 시도도 못해봤습니다.

제가 스스로 재능이라고 느낀 부분은 제 전공, 업무 분야였던 IT에서의 기술 이해력이었습니다. 특정 기술들에 대해 거의 순식간에 직관적으로 이해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또한 대체로 기술 이해도가 높고 빠릅니다. 그래서 궁금한 것을 묻는데 주저함이 없는 편입니다. 제가 생략이 많거나 투박한 설명으로 쉽게 이해가 잘 안 되면 보통 다른 사람들도 이해를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몇 개 영역에서는 한번 본 것만으로 흡수되듯 기억되고 이해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다들 누구나 그런 분야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과학기술 특화 기관에 아주 많겠지요.

예를 들어 대학생 시절 C++ 프로그래밍 언어의 문법과 이해에 어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이 흡수되듯 습득해서 사용했고, 이 개념이 왜 이해가 안된다는거지? 이해가 안되서 내가 뭔가 잘못했나 했는데 빠르게 짜고 다 잘 돌아가고 시험에서도 높은 성적을 받았습니다. 코딩 습관이 다른 것처럼 여러 버전으로 코드를 만들 수 있었으며, 모든 프로그래밍 과목에서 A이상의 성적을 받았습니다. (현재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지 않습니다. 프로그래밍이 필요한 부분은 ChatGPT에 외주주고 있습니다. 제대로된 결과가 안 나왔을 때 다시하라고 시키는 재미가 있습니다.  ) 이쪽 분야 또는 제 특징에 관심이 있으면 다른 포스팅을 참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최근에는 아이가 레고를 시작함에 따라 제가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네 제가요.

듀플로 기차 시리즈, 동물 시리즈, 중장비 시리즈

빨간 기차 10874, 비슷한 시기 나온 화물기차 10875, 다리 10872
25년 신제품 10428, 저렴이 10427, 교각 10426, 터널 10425
동물은 2025년 건 별로고, 2022년 10975가 지도를 줌. 세계옛날거 10806, 세계2 10907, 유럽 10979, 야생 10975, 아시아 10974, 남미 10973, 아프리카 10971

중고거래 앱에 특정 모델을 명시한 판매글이 아니라 ‘레고 여러개 섞여 있어요.’, ‘일괄 묶음’ 이런게 올라오면 대충 찍은 사진에서 특징적 부품만으로 어떤 모델인지 바로 파악하고 필요하면 채팅을 걸어야 하니까요. 아이는 잘 때 제가 없으면 찾으며 울기에, 재우고 밤 10시쯤 나가야 해서 아주 제한된 시간밖에 없으니 빠른 판단이 중요합니다. 이게 정말 재미있습니다. 가져온 레고의 블럭들을 어떤 모델의 일부가 맞는지 확인하고, 새로운 것들은 모델 번호를 파악해서 잔류할지 내보낼지 결정합니다.

설문지에 있지만 떨어지는 분야도 있습니다.

책에는 언어능력이 뛰어나 일주일만에 새로운 언어를 습득한 사례가 나오는데,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언어 문법과 단어에 예외가 많다고 느끼는 순간(불어, 독어가 심하고 영어도 그닥 패턴이 강하다고 느끼지 않음) 재미가 없어졌고, 귀가 안 좋아 소리가 잘 들리지 않거든요. 언어의 어원에서 반짝 흥미를 느껴 집에 라틴어 교습책은 있는데, 그 흥미가 길게 지속되지는 않았습니다. 아 영어 잘하고 싶다…

또, 숨쉬듯 쉽게 하는 분야가 있다면 하나 하나 큰 주의를 기울여서 해야하고 그래서인지 금방 지치고 마는 분야가 있는데, 돌봄노동이 그렇습니다. 육아를 하며 정말 스스로의 부족함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체계화 성향이 강하면 사회성이 떨어질 수 있는데 저는 보통 정도입니다. 일단 혼자서도 잘 놀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흔히 말하는 MBTI의 E형으로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식이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거든요. 처음 본 사람들은 먼저 말을 걸고 인사하는 제가 엄청 외향적이고 사회성이 좋은 줄 알지만, 혼자있는 시간을 중요시하고 사람의 감정을 섬세하게 신경쓰지는 않습니다.

이런 제게는 책에 나온 신경다양성 이야기가 꽤 위로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뇌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 그 덕에 인간의 신경다양성이 풍부해진다. 지적 장애가 없으며 고도로 체계화하는 자폐인의 마음은 오랜 세월 진화를 거쳐 온 자연적 뇌 유형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 자폐인, 그리고 자폐 진단을 받지 않았지만 고도로 체계화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유형의 뇌 중 하나에 해당할 뿐이다. 이들의 뇌가 잠재력을 활짝 꽃피울지 고통 속에서 살아갈지는 이들이 어떤 환경에 놓이는지에 달려 있다. 덴마크의 한 자폐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바닷물 속에 던져진 민물고기와 같습니다. 민물고기를 바닷물 속에 넣으면 몸을 뒤틀며 고통스러워하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그대로 죽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를 민물에 넣어주면 잘 살아가고 번성하겠지요.’

(중략) 신경다양성은 사람이 다양한 경로를 따라 발달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공간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있고, 음악 천재가 있는가 하면 수학 천재도 있으며, 남보다 훨씬 사교적인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수많은 특성을 지닌 사람이 있다. 인간이라는 집단 속에 이 모든 유형의 뇌가 존재한다.  (중략)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천재다. 하지만 나무에 오르는 능력을 기준으로 물고기를 평가한다면, 그 물고기는 평생 스스로 멍청하다고 여기며 살아갈 것이다”. 그야말로 요점을 정확히 짚은 말이다. “

생태계에 다양한 동식물이 있듯, 인간에게도 다양한 뇌 종류가 있고 제각기 살고 있다는게 다채롭고 풍요로운 느낌을 줍니다.  어렸을 때는 남들과 다르다고 느꼈지만 이제는 사회의 한 구성요소로, 모자이크의 한 조각처럼 살고 있습니다.


(최근 방문한 과천 국립과학관 시계 태엽 장식)

커다란 시계 태엽이 맞물려 돌아가는 이미지를 보면 지극한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뻗어올라온 산맥의 능선, 동그랗고 매끄러운 돌, 구멍이 뚫린 화산암, 정밀하게 돌아가는 기계, If-Else 처리를 잘한 로직, 설계대로 동작한 대단위 Config 변경 작업, 대를 이은 유전자의 발현과 억제, 나무의 정확한 이름을 속삭이며 현재의 모습에 더해 새순, 꽃, 열매, 겨울 모습을 중첩해서 느끼는 것, 우주탐사선의 스윙바이(Swing-By)…이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더욱 크고 강하게’ 느끼고 누릴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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